향수와 기억

2011. 2. 3. 23:09 from 청춘일기
비염이 있어서 다른 감각에 비해 코는 그다지 예민한 편이 못 된다. 그래서 난 내 코를 별로 신뢰하지 않는다. 심지어 상한 케익을 맛있게 먹은 적도 있을 정도다. 

설 연휴 전날 방을 대청소하면서 잘 안 쓰던 서랍장을 열었는데 스물 한 살 무렵 사귀었던 첫 여자친구가 준 작은 싸구려 향수가 나왔다. 워낙 오래된거라 별 생각 없이 남은 향수를 세면대에 버리고 병은 쓰레기통에 버렸는데 사흘이 지나도록 화장실에서 향수냄새가 계속 나는거다. 향기가 어찌나 강한지 둔감한 내 코로도 확연히 느낄 수 있었다. 그런데 정말 신기한건 그 향기를 맡은 후 잊혀진 기억들이 주마등처럼 스치고 지나갔다. 마치 기억을 떠오르게 하는 촉매처럼. 말도 안되게 어설프고 불안하고 풋풋했던 그 시절 어린 사내의 좌충우돌 연애가 떠올라 슬며시 미소가 지어졌다. 얼마전에 본 유희열의 스케치북에서 첫사랑의 기억에 대해 루시드폴이 이렇게 말을 했다. "의욕은 앞서는데 방법도 모르고 능력도 없었죠." 

그런데 그 때에 비해 지금은 과연 얼마나 성숙해진걸까? 나이를 먹으면서 해도 되는 말과 하면 안되는 말을 구별하는 능력과, 기분이 표정에 드러나지 않게 하는 능력을 갖게 된 것 같긴 한데, 실제 마음의 깊이가 얼마나 더 깊어진건진 잘 모르겠다. 여전히 의욕은 앞서지만 방법을 모르는 것도 마찮가지고. 그래도 이제 그때처럼 방법을 모른다고 불안하지는 않다. 어릴적엔 수학 공식처럼 연애도 반드시 해야하는 과정이 존재하는줄 알았는데 이제는 그게 아니란걸 깨달았으니까. 이제는 방법을 창조하는 여유도 생겼다. 연애는 걍 하는거라는 임경선씨 말이 맞았다.

'청춘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반창고  (0) 2011.04.02
졸업  (6) 2011.03.03
울산 단상  (2) 2010.08.11
읽기의 즐거움  (4) 2010.07.28
몽롱  (6) 2010.07.11
Posted by 우연의음악 :